<행복도 불행도 자신이 만든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초하루 법회에 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초하루이지만 티벳에서는 오늘이 설날이라고 합니다. 티벳에서의 새해 첫날이 오늘인 셈입니다.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것이지만 누구나 똑 같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똑 같이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제각기 다르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초하루법회를 하고 있지만 티벳에서는 설날로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은 다른 시간이 아닌 똑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삶으로 다른 생각으로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지내는 지금 이 순간 순간들이 다 같은 시간이지만 이웃집에서 가서 품을 파는 시간과 내 집에서 품꾼을 사서 일하는 시간은 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내 집에서 품을 사서 일을 시키는 사람은 시간이 빨리 가고 남의 집에서 품을 팔며 일을 하는 사람은 지루하고 긴 시간입니다.
로마신화에 보면 여러 신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야누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야누스는 두 얼굴의 신으로서 문을 수호하는 신입니다. 집이나 도시 출입구의 문을 지키는 수호역할을 하고 있는데, 문의 안과 밖의 경계에 야누스신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는 신이 야누스신입니다. 문이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세상과의 경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야누스라는 것은 모든 사물과 계절의 시종(始終)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 또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는 야누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이 시간들은 각각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내고 있는 이 순간 순간의 시간들이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 속에 행복과 불행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이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가운데서도 우리들이 어떤 인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법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 것들입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모두 인연법입니다. 인연은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인연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인연이란 스쳐가는 바람이나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이고, 끊임없이 형성되어 가는 것으로서 자신의 모든 일들과 환경, 상황들이 자신의 마음 따라서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잘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을 가장한 우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인연이란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끈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국에 무착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이 스님께서 원력을 세우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항주에서 오대산까지 삼보일배를 하면서 고행 끝에 오대산에 도착합니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소를 타고 가는 노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노인이 무착스님을 보고 자기 처소에서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권합니다. 스님은 몸도 지치고 목도 마른 참이라 쉬어 갈 셈으로 노인을 따라가서 향기로운 차를 대접받습니다. 그리고서 이왕 내친김에 하루 밤을 자고 가기로 작정하고 노인에게 하루쯤 쉬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하자 노인께서 “상(相)이 있는 이는 내 집에 머물 수가 없다”고 말하자 무착스님은 즉석에서 “저는 상(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노인이“계(戒)를 잘 지키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무착스님은 “출가수행한지 7년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계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그것이 바로 상(相)입니다.” 하고 무착스님을 쫓아내어 버립니다. 이에 크게 느낀 무착스님은 다시 항주로 돌아와서 자신의 아만심을 없애기 위해 열심히 정진합니다. 이처럼 출가수행자들이 자기는 자신을 지킨다고 하는 상(相)에 쌓여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相)에 빠져있음을 자신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연!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 속에는 우리들이 인연법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 가운데 인연법이 절로 지어집니다. 더러운 냄새나는 시궁창에는 파리모기가 모여들고 아름다운 곳에서는 벌과 나비가 넘나드는 것과 같습니다. 명명백백한 사실은 지금도 우리들이 파장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파장 속에는 우리들의 인연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절에 오셔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부처님께 예경 올리는 분에게는 불보살님과 화엄신장들의 가호가 있을 것이고 탐욕으로 사시는 분에게는 번민의 날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복을 부르는 마음이 있고 재앙을 부르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통이 닥쳐오면 인간의 마음은 한순간에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고통이 닥쳐올 때 마음가운데 자각이 있는 인사라면“내가 과거에 지은 업이 이렇게 녹아 내리는 구나, 부처님 참회합니다. 이렇게 하여 업장을 녹일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하고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고통이 닥쳐왔을 때 조상과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있어 자식인 두 아들을 키우는데 두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서 어머니가 야단을 치는데, 한 아이는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하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면 어머니는 꾸지람이나 매를 멈추게 됩니다. 그런 반면 한 아이는 “내가 뭘 잘못했어요?”하고 대들면 더 심한 매를 맞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복을 부르기도 하고 재앙을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에 따라서 좋은 인연을 만들고 나쁜 인연을 만드는 마음이 이렇게 달라집니다.
불교는 스스로 깨닫는 자각의 종교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각하고 좋은 인연을 지어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 느끼는 것만이 자기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일러주고 가르쳐 주는 것은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지식은 포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한순간 생각의 전환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자살’이라는 말도 생각을 바꾸어 거꾸로 보면 ‘살자’가 되는 것입니다. 탐착과 집착을 끊으면 그것이 극락정토가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한순간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마지막 순간을 알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은 뭘 성취하기 위해서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을 위안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움에 봉착하여 기도를 하지 않으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의지와 실천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해서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행복한 삶은 큰일 없이 사는 것입니다. 많이 벌면 많이 쓰게 마련입니다. 돈이 많이 나가면 그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많이 벌지도 적게 벌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현상유지 하는 평범한 삶이 가장 마음 편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기도하실 때 ‘그냥 이대로 편안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이대로만 살게 해달라고 하세요. 이것이 가장 좋은 기도이고 편안한 기도입니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들어오는 것은 나가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경제위기는 결국 불신 때문인 것입니다. 불신은 결국 자신만 이득을 취하고자 하거나 자신만이 살아나가고자 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신뢰를 쌓는 것입니다. 위기의 본질은 불신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러한 불신에서 벗어나 신뢰와 불신의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살아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일어난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불신의 내면에는 진실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기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그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믿음이 충만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 때 흔히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우리는 살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꽃잎도 나무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연은 더 높이 치솟아 오르고 닻이 달린 배는 망망한 대해를 더 잘 달립니다. 어찌 삶에 바람이 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살만한 세상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처한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음먹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던 마더 테레사의 본부에 있는 건물 벽에 이런 시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 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일이 내일이면 잊혀 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당신이 몇 년에 걸쳐 세운 것이 하루 밤사이에 무너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 하라.
당신이 가진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세상에 주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일은 많은 사람과 만나고 또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위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내가 만난 사람에게 아픈 가슴의 이별이 찾아와도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에게 기약 없는 방황이 찾아와도 무작정 그를 안아줄 수 있는 금전과 비례하여 감사하는 마음들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존경할만한 스승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믿을 만한 친구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 사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자신의 작품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에게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의 부처님이 함께 하신다면 여러분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인연을 만드십시오. 그래야만 순간 순간의 시간들이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두 개의 얼굴이 아닌 아름답고 행복한 하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불기2553년 2월 25일 德祖(주지)스님 초하루 법문 중에서/知愚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