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설(12) 깨달음에는 상(相)이 없다.

덕조德祖/조계총림 송광사 승가대학장

一相無相分 第九 일상무상분 제구

< 본문>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斯陀含사다함 能作是念능작시념 我得斯陀含果不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言수보리언 不也불야 世尊세존 何以故하이고 斯陀含사다함 名一往來명일왕래 而實無往來이실무왕래 是名斯陀含시명사다함
< 해석>“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번 갔다 온다’는 말이지 사실은 가고 옴이 없으므로 이름만 사다함이라 한 것입니다.”
< 강설> 부처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사다함’이 자기 스스로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 같으냐?”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수보리존자의 대답은“아니옵니다. 부처님 ‘사다함’도 이름은 ‘한번 왔다 가는 이’라 하지만 사실은 오고 간 것이 없고, 부르기를 ‘사다함’이라 한 것이옵니다.”하고 말합니다.
첫 번째 수다원은 깨달음에 들어간 사람이고(須陀洹 名爲入流), 두 번째는 깨달음에 들어가서 즉‘한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합니다(斯陀含 名一往來). 수다원과를 증득하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집착도 없고 머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업을 끊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여 습(習)이 남아 있어 여전히 미세한 업을 짓게 됩니다. 업이 있는 한 윤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업이 소멸되어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솜털처럼 가벼워진 상태를 사다함이라 합니다. 즉 일왕래(一往來)라는 의미는 한번만 더 갔다 오면 두 번 다시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다함이 스스로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분별이고, 의업(意業)을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아상이 됩니다. 그래서 사다함은 ‘나’라는 상도 없는데 어떻게 사다함을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다함은 이름하여 사다함이지 실체는 없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수다원과도 사다함과도 정해진 과위(果位)는 없습니다. 편의상 이름을 붙여 수다원이라고 했고, 사다함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은 내가 수다원이라는 생각이 없고, 사다함은 내가 사다함이란 생각이 없습니다.

< 본문>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阿那含아나함 能作是念능작시념 我得阿那含果不아득아나함부 須菩提言수보리언 不也불야 世尊세존 何以故하이고 阿那含아나함 名爲不來명위불래 而實無不來이실무불래 是故名阿那ㅎㄹ含시고아나함
< 해석>“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실은 오지 않는 것도 없사오니 그래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 강설> 아나함은‘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더 이상 남아 있는 업이 없어서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의 세번째의 과위(果位)입니다. ‘수다원과’를 증득하면 비로소 성인의 유(流)에 들은 것인데, 이 성과(聖果)의 일학년인 수다원과에 들어간 것을 칠래과(七來果)라 하고, 이학년인‘사다함과’를 일래과(一來果)라 하고, 또 사다함과는 수다원과를 일곱 번 왕래하고, 다시 한 번 왕래를 더 왕래 했다 해서 팔왕래(八往來)라 이름 하기도 합니다. 삼학년인 ‘아나함과를 불래과(不來果)라 이름 하는데 그렇지만 그렇게 왕래하면서도 왕래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시오. 수시로 친구를 만나 놀러가고 지옥 천당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왔다 갔다는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업(業)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는 오고 가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뼈를 깎는 수행을 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흐름에 들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은 중생심이 생겨 바로 중생계로 떨어집니다. 깨닫고자 마음을 일으키거나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기 위해 수행한다고 하면 바로 흐름을 벗어나고 맙니다. 그래서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평안하게 푹 쉬며 흐름대로 흘러가면 됩니다. 오로지 무위(無爲)만 있어서 하는바 없이 행하는 삶이고 수행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실로는 가지 않는 것도 없다(實無不來)고 한 것입니다.

< 본문>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阿羅漢아라한 能作是念능작시념 我得阿羅漢道不아득아라한도부 須菩提言수보리언 不也불야 世尊세존 何以故하이고 實無有法실무유법 名阿羅漢명아라한 世尊세존 若阿羅漢作是念약아라한작시념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 卽位着我人衆生壽者즉위착아인중생수자
< 해석>“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어떠한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다.’ 하면 곧‘나라는 생각’,‘너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강설> 절에 가면 나한전이 있습니다. 나한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천진불(天眞佛)이라 말합니다. 표정이 경직되어 있지 않고 극히 자연스럽고 가식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진난만한 ‘나한이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법을 얻었으면서도 일부러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무유법(實無有法)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과는 수행 사과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입니다. 부처님이 스스로 ‘대아라한’이라고 표현하셨듯이 욕계, 색계, 무색계를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윤회로부터 벗어나 불생(不生), 즉 열반의 경지에 갔음을 말합니다. 만약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도 없는 번뇌가 아라한에게 있겠습니까?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떨어지고 맙니다. 아라한은 나라는 생각도 없는데 스스로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나, 너, 중생, 수자상이 사라졌을 때 오는 경지입니다.

< 본문> 世尊세존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 最爲第一최위제일 是第一離欲阿羅漢시제일이욕아라한 世尊세존 我不作是念아부작시념 我是離欲阿羅漢아시이욕아라한 世尊세존 我若作是念아약작시념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 世尊세존 卽不說須菩提즉불설수보리 是樂阿蘭那行者시요아란나행자 以須菩提이수보리 實無所行실무소행 而名須菩提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시요아란나행
< 해석>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제가 ‘다툼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라’하시고, 이것이 첫째가는 욕심 없는 아라한이라고 말씀 하셨지만, 세존이시여, 저는‘제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에게 아란나 행을 좋아 하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수보리가 행함이 없이 행하기 때문에 수보리는‘아란나 행을 좋아한다.’고 이름 하셨습니다.
< 강설> 부처님께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쟁삼매는 말 그대로 다툼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분별과 다툼으로 살아갑니다. 다툼은‘나’라는 상(相)에서 시작됩니다.‘나’가 있으니 아집이 생기는 것이고 ‘나’라는 상이 있으니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과 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있는 한 분별과 다툼이 계속됩니다. 다툼이 없다는 것은 아상을 버린 것이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상이 다 깨지고 나면 일체의 모든 분별이 사라져 비로소‘다툼이 없는 삼매’ 곧 무쟁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하셨으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가 사라진 자라는 뜻이고, 무아(無我)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또 다시 일체 모든 욕심이 사라지고 집착과 번뇌가 사라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수보리는 그야말로 실무소행(實無所行) 실제로 마음 닦을 것도, 실천할 것도 아무 것도 없고 수행이 완벽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란 무학(無學)이라 하고, 아무것도 없는 지위에 올라와 더 나아갈 곳이 없는 모습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과(四果)의 최고 학년인 사학년은 모든 분별이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으며,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고, 내가 해야 할 수행도 없습니다. 실제는 수행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없는 무위법(無爲法)의 행을 ‘아란나행’을 좋아 한다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 성취하고 나서 중생계를 바라보니 본래성불(本來成佛)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인데 무엇을 다시 깨달으려고 하는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사람은 부처답게 살고, 자신이 부처인줄 모르는 사람은 업대로 중생노릇하고 삽니다. 그래서 도인은 무위(無爲)로 살고, 중생은 유위(有爲)로 산다고 합니다.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무슨 즐거움으로 사는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가운데 어떤 상(相)이 가장 많은가? 그 상부터 버리고 또 버려야 부처와 가까워지고 행복해집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항상 내 곁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본래 그대로 산은 산! 물은 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