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강설(9) 얻은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덕조德祖/조계총림 송광사 승가대학장
無得無說分 第七 무득무설분 제칠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如來여래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如來有所說法耶여래유소설법야 須菩提言수보리언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 無有定法무유정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亦無有定法역무유정법 如來可說여래가설 何以故하이고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 皆不可取개불가취 不可說불가설 非法비법 非非法비비법 所以者何소이자하 一切賢聖일체현성 皆以無爲法개이무위법 而有差別이유차별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무상정등각라고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실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현성이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無得無說分 第七 -얻음도 설함도 없다.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칠분은 석가여래께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성취 하셨지만 성취한 바가 없고, 45년 동안 설법을 하셨지만 말씀 하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법은 본래 있는 것이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새로 발견했다고 해서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면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불법이란 금강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불법佛法을 어떤 개념으로 규정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뇩바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그 깨달음이 더 없는 최고의 정법이라 합니다. 정법이란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고 자기 분별식으로 보고, 듣고, 말합니다. 우리의 오관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이 달라 진실한 그대로의 못 보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생각하는 것을 원리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다 뒤바뀐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물을 사실 그대로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이것이 정각正覺입니다. 중생들의 생각, 개념은 다 이렇게 불완전한 오관작용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잘 못 된 것들이 많습니다. 중생의 이런 착각을 떼어버린 마음자리만 드러난 부처님에게는 얻는 것도 설명할 법이 없습니다.
만일 얻은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관에 의한 착각일 뿐 마음자리가 아닙니다. 마음만 드러난 자리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끊어지고 시간과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얻은 법도 얻을 주관도 없습니다. 마음을 깨쳤다고 하여 새로운 것을 얻은 석도 아니고 본래부터 있던 마음 그대로이므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을 것도 말할 석도 없는 도리를 말하는 의미의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본문>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해석>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강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문득 그것을 묻습니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느냐? 또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는가? 그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모든 존재의 空(공)의 이치를 아시는 慧空(혜공)의 수보리 존자가 이런 질문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 중생들은 모든 상에 집착해서 한 것은 더 자랑하고 싶어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시니 얻은 바도 설한 바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입니다.
<본문>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해석>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무상정등각라고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실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강설>이 질문에 수보리가 겸손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실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고정된 실체법이 없고 고정된 길이 있지 않은 세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세계입니다. 부처님 되는 길은 많습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늘 선택의 연속이며 잘 선택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모두 근기에 따라 한 길을 택해 꾸준히 갈 뿐입니다. 여러 갈래 길 중에서 내가 가는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나의 길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면 아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길 안내자다. 많고 많은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하되 가고 안 가고는 너희에게 달렸다”고 하십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부처님의 분신입니다.
수보리존자는 여기서 겸손하게 무유정법이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떤 정해진 부처님 설법이라고 해서 여래의 설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해석>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설>여래가 말한 바 법식이라고 하는 것은 꼭 이것만이 최고라고 하지 않으니 상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설법의 형식은 다종다양합니다. ‘이것만이 부처님 길이다’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불교는 고정된 것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모든 학문에 통달했다 해도 부처님보다 많이 알 수야 있겠습니까. 항상 융통성 있고 나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조차도 내 것만이 옳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양보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라는 것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다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부처님의 자세입니다. 부처님은 고정된 실체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해석>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현성이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등장하는 부처님을 제외한 성자, 현자들은 모두 다 이와 같은 무위법을 갖고서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차별경계에 빠져서 다툼을 끊임없이 계속합니다. 무위법이란 현상경계를 떨친 법, 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인 세계입니다. 내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세상에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부처님 세상은 시비를 떠난 자리, 싸움이 없고 마음이 평안한 자리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모든 존재의 실상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도 모든 존재의 원리대로 똑 같은것이기 때문에 그 똑같다는 존재의 실상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바로 그 원리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이치에 맞게 당신의 깨달음과 설법을 그렇게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無得無說分(제칠분 무득무설분) “얻음도 없고 설함도 없다”에서 얻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이고 道(도)를 얻은 것이고 說(설)은 說法(설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얻으신 깨달음과 설함 까지도 부처님 마음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는 그런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집착을 내려놓고 차별심을 떠나야 무위법을 얻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