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매미 울음소리가 매우 요란하네요.
매미소리가 큰 것을 보니 날씨가 꽤 무더운 모양입니다.
모두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휴가를 못 가신 분은 길상사에서 휴가를 보내십시오. 길상사에 오시면 계곡물소리도 들리고 매미소리도 듣고 지장전 앞 연못에는 하얀 백련이 피어있습니다.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연화장세계를 장엄하고 있는 것이 흰 연꽃입니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뿜으며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음으로써 정진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동아일보기자들의 불자모임이 생겨서 법회에 초청되어 갔는데 어떤 기자분이 ‘길상사에서도 수능백일기도를 합니까? 길상사에서 만큼은 백일기도 같은 것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스님, 그것 너무 기복적인 것 아닙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것이 기복이고 무엇이 기복이 아닌가요? 기복의 기준이 무엇 입니까? 이는 수능백일기도를 앞둔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일입니다. 백일기도를 해야만 대학에 가고 부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떨어지는 것인가? 기복이란 복을 빌거나 복을 바라는 것으로 기복신앙은 얼른 느끼기에 부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을 바라는 것이 왜 부정적인 것일까요. 그것은 돈이나 명예 등 개인의 이기심을 충족하기위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받는 것은 기복이 아닙니다. 복을 바라는데 있어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결과를 바랬을 때 그것이 기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이 기복입니다. 또한 복을 얻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방법을 쓰기 때문에 그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이 아닌 작복을 하라고 합니다. 복을 빌기보다 복을 지어라는 것입니다. 복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위해 베풀고 함께 나누는 마음이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부처님 전에 나아가 ‘무엇을 해주십시오.’ 가 아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중생심이 아님 보살심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계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없애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복을 위해서 절을 찾아갑니다. 가족의 건강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직장문제이든 삶에 관련된 물질적 어려움이나 심리적 불안에 대한 해결을 얻고자 사찰이나 교회, 성당 등을 찾아갑니다. 당면한 불안에 대해 위안 받고 일이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절에 오게 되고, 절에 온 동기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기복적인 것 같지만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올 수 있는 인연이 안 되었겠지요.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딘가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이를테면 부부가 사랑해서 결혼하여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여자가 남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듯이 절에 와서 부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써 끊임없이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근원적으로 기복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복이란 인간의 내면에 깔려있는 가장 간절한 마음이면서 가장 순수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늘 기도하면서 이웃이나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기도하는 것을 기복이라고 비판하기 앞서 내 자신보다 가족이나 아이들과 같은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나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공동체는 가족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공동체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복을 지으려면 베풀라고 합니다. 공덕이란 지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면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요, 공덕입니다.

흔히들 기도는 타력신앙이라고 하는데 기도는 타력도 자력도 아닙니다.
타력신앙이라면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자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도움이 있겠으며 자력신앙이라면 주위의 도움이 없는데 어떻게 기도가 성취되겠습니까? 제 잘나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혼자 잘나서 사는 것 같지만 주변의 도움이나 보살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변의 환경이 좋지않으면 내가 살아가는데 불편한 것이고 주변이 잘살면 나도 더불어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의 감응(感應)이란 불보살님께 기도하는 마음이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방적인 말이 아닌 상방적인 말로써 ‘감(感)’이란 불러들인다는 뜻으로 중생이 불보살에게 다가가는 의미이고, ‘응(應)’이란 불보살께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가 산에서 ‘야호’하고 외쳤을 때 응답하는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물이 맑아진 만큼 달이 비치는 것처럼 우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젖을 물리듯이 중생이 부르짖는 만큼 대답하는 것이 감응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보살의 가피도 아무런 장애도 성취도 없습니다. 기도할 때 무엇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고 기도하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한다면 분명히 장애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성취가 있습니다.

기도의 성취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마치 런닝머신에서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인 것과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하는 일 없이 10년을 보내고 어떤 사람은 뛰면서 10년을 보냈습니다. 돌이켜보니 두 사람 모두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뛴 사람은 체력이 건장해지고 정신이 건강한 반면 10년 동안 노력하지 않고 있던 사람은 늙고 병들어 있었습니다. 기도란 이처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들 입니다. 기도는 생각이 아닌 실행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입니다.

수능을 앞둔 부모들의 기도는 시험을 앞둔 자식에게 믿음과 함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줌으로써 공부에 집중하고 시험에 임하여 장애를 받지 않고 긴장하지 않으면서 자기 실력대로 무난히 시험을 치루게하는 보조역활인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한 영가천도는 간절한 마음이 영가와 교감하여 감응할 때 원만한천도가 되는 것입니다. 남이 대신하거나 건성으로 하는 기도는 영가가 감응하지 못합니다. 지장경에 의하면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의 공덕이 칠분의 일은 영가에게 칠분의 육은 기도하는 본인에게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기도는 대상이 그 누구이든 성취되기를 바라는 자기 자신이 직접하고 간절히 할 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의 법문 중에 어떤 분을 8시 반까지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도록 간절히 기도를 하였더니 상대방은 전혀 그 시간에 그곳에 올 생각을 안했는데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힘입니다. 마음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지극히 간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감응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간절하게 감동되었을 때 남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고3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편안한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편안한 마음과 믿음이 아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은 스스로를 지옥으로 만듭니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빗방울을 담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물이면 미련 없이 쏟아버립니다. 고통이란 극복의 대상이지 없앨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가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데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것이 중생계입니다. 두 손에 쥔 것이 많다는 것은 나눠줄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욕심은 욕심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욕심은 버려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욕심을 채우면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무거움을 얻게 됩니다.

만일 연잎이 빗방울에 욕심을 낸다면 빗방울은 더 이상 연잎에 모이지 않습니다. 모였다하더라도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가치 없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고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하더라도 결국은 빗방울의 무게에 못 이겨서 연잎줄기가 뿌러집니다. 연잎이 스스로 뿌러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연잎은 빗방울을 소유하지 않기에 뿌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빗방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치면 빗방울은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지닌 모든 소유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빗방울 사라지듯 사라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무엇을 얻음으로써 행복해진다는 것은 그것을 잃음으로써 불행해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비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연꽃을 통해서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금을 얻기 위해서는 은을 버려야하고 다이야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어렵게 얻은 금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버리고나면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미지의 공허가 두려워서 우리는 하천한 것들에 집착하며 살고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집착에서 비롯되지만 진정한 기도에 들어가면 그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만 내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해서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려서 얻는 것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아무리 얻어도 더 큰 목표가 생겨서 만족이 있을 수 없지만 버리면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덤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아이들이 이정도 했으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아이들이나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요구치가 높을수록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항상 불만스럽고 그 불만이 마음의 암적 존재로서 내가 고통스럽고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백중기도, 수능기도 등을 통해서 내 자신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 해보십시오. 내가 얻기 위해 하는 것인가? 버리기 위해 하는 것인가? 절에 와서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보면서 비움의 미덕을 깨닫지 못한다면 한낱 허울 좋은 무늬만의 불자입니다. 기복도 작복도 다 중요합니다. 신심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통해 작복 하라고 아무리 권해도 되지 않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은 1600년 초반부터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만석꾼의 전통을 대를 이어 지켜왔다고 합니다. 1950년에는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집의 가훈에는 자기재산을 절대로 쌓아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께서 조언하기를 재산이란 쌓아두면 분뇨가 되고 뿌리면 거름이 되어서 수확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 한마디가 ‘최부자’의 가훈이 되어 주변 300리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삶으로써 대를 잇는 부자의 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내 욕망만 성취하겠다는 마음으로 옆 사람의 기도에 방해를 끼친다면 그 또한 업을 짓는 것입니다. 기도는 더불어 같이하는 것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 먼저가신 조상님에 대한 영가천도와 6일부터 시작되는 수능백일기도에 간절한 염원을 담은 기도를 통하여 무더위를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불기2552년 8월 1일 德祖(주지)스님의 법문중에서/知愚정리-